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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해경 아카이브’ 사라지는 항·포구 ㊻하의면 신도항 상세보기 표 - 제목, 작성자, 등록일, 내용, 첨부파일로 구성
‘서해해경 아카이브’ 사라지는 항·포구 ㊻하의면 신도항
작성자 조현경 등록일 2022.06.20



저수심 심화 결항 잦아 … 차도선 사실상 1회 운항
-하의도 당두항이 관문… 땔나무 많은 섬·쌀 귀해 예전 점심은 고구마와 보리-
-서해해경, 주기적 순찰·응급환자 이송 … 섬 안보와 치안의 보루 인식 심어줘-
 


신도(薪島)는 행정구역상 전남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다. 하의도 북서쪽에 위치한 당두항에서 차도선으로 30여분 거리이며, 섬의 동쪽 바다 건너에는 하의도가, 북쪽에는 대야도, 그리고 멀리 서쪽 바다 너머에는 우이도가 자리한다.

 

섬의 지명 유래와 관련해, 마을 어귀의 선착장 마을 표지석에는 ‘새로운 섬이라 하여 신도라 부른다’고 새겨져있다. 이와 함께 신도의 ‘신(薪)’자가 땔나무 등을 의미하는 ‘섶신’인 것에서 나타나듯, 섬에 땔감으로 쓰기에 적당한 나무가 많아 신도로 불리게 됐다는 유래도 전한다. 이는 신도가 한 때 ‘섶섬’으로도 불린 것에서 뒷받침 된다.

 

신도의 관문인 신도선착장은 섬의 북쪽에 자리하며, 신안군의 준공영 차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섬사랑15호’가 하루 2차례 운항한다. 하지만 갯벌이 널리 분포된 신안군의 해안특성상 바닷물이 많이 빠지는 날에는 아침배가 운항되지 못한다. 실제로 5월 들어서도 초순과 중순에 각각 3일 정도의 결항이 있었다. 사실상 하루 1회 운항인 셈이다.

 신도항 

신도의 경우 신안의 여느 섬들과 달리 지리적으로 군의 외곽에 위치하고 큰 섬을 가는 길목에 위치하지 않아 지금까지 육지와 연결되는 직항로는 한 번도 신설되지 않았다고 한다.

 

“신안군의 지원으로 40여 년 전에 마을에서 도선을 운영한 적이 있습니다. 이 도선은 하의도 당두항과 연결됐습니다.”

 

신도 토박이인 이○○씨(77·큰모실)는 ‘목포와 연결되는 배편이 없었기에 뭍에 나가려면 하의도 당두로 나갔다’며 ‘예전에는 당두항에서 육지로 나가는 배도 타고 인근 대리마을에서는 생필품을 구입했다’고 말했다.

 

신도는 2022년 5월 현재 선착장이 위치한 ‘큰모실(큰마을)’과 섬의 서남쪽 ‘안태골’의 2개 마을에 40여명 가량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한때는 이들 마을 외에 ‘멍애골, 다래이, 고재’라는 3개의 마을이 더 있었으며, 하의초등학교 신도분교장이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도회지처럼 학생수가 많지 않아 2년마다 ‘국민(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4살 더 먹은 언니, 오빠나 나이 어린 동생들과 학교를 8년 동안 다니기도 했습니다.”

 

신도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정○○씨(63·여·큰모실 거주)는 ‘1960~70년대 초반까지는 ‘육성회비(기성회비)’를 내고 ‘국민학교’를 다녔다‘며 ’이 때문에 가난한 아이들은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고 기억했다.

 

정씨가 다녔던 신도분교는 1999년 폐교됐다. 하지만 이 학교는 이후 잠시 ‘재개교(?)’되기도 했다. 2005년 개봉된 영화 ‘우리선생님’의 촬영이 폐교된 신도분교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신도의 경우 사실상 논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쌀이 매우 귀했으며, 보리를 비롯한 잡곡과 고구마가 주식이었다고 한다.

 

“쌀이 어찌나 귀하던지 제사상에 올리는 밥에도 위에만 쌀밥을 조금 얹고 아래는 보리밥을 담았어요. 1980년대 이전까지는 그렇게 보리밥을 주식으로 하며 살았습니다.”

 

이○○씨(78·큰모실)는 ‘논이 일절 없었기에 생일이나 명절, 제사 때도 쌀밥을 제대로 못먹었고 명절에도 송편을 몰랐으며 대신에 팥시루떡을 했다’고 회고했다.

 

“예전에 가을부터 봄까지 신도의 점심은 거의 ‘감자(고구마)’였습니다. 썰어서 말린 절강감자를 ’돈부(콩의 일종)‘와 함께 가마솥에 넣고 삶은 다음 사카린과 소금을 조금 치고 죽처럼 해 먹었습니다. 여기에 쌀 한줌이나 조, 수수를 넣기도 했어요.”

 

정씨는 ‘그때는 식량이 부족해 만든 음식이었지만 아주 별미였고 지금 먹어도 맛있는 음식이다’며 ‘당시 주민들은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보리를 수확한 다음, 밭두둑에 감자(고구마)를 심고 고랑에는 돈부를 재배했다’고 설명했다.

 

신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20여 년 전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발전기를 가동해 밤 7~9시 사이에만 전기가 공급됐다고 한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사기등잔에 석유를 넣어 불을 피는 ‘초코지’라는 ‘호랑불’을 피고 살았어요. 석유가 없던 시절에는 물고기 기름을 등잔에 사용했습니다.”

 

송○○씨(70·큰모실)와 이씨는 ‘생선의 애(간) 덩이를 솥에 끓이면 기름이 나오고 이 기름을 등잔에 사용했다’며 ‘생선 기름은 돼지 등의 동물 기름과 달라 겨울철에도 굳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신도의 경우도 인근 하의도 등과 마찬가지로 잔치성격의 특이 상·장례 풍속인 ‘밤다리’가 1980년대 후반까지 행해졌다고 한다. 이때 돼지 육수로 만든 ‘갈파래국’이 끓여졌다고 한다.

 

한편, 신도의 주민들은 해양경찰이 안보와 치안의 보루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청장 김종욱)의 경비함이 주기적으로 인근 해역을 순찰하고 응급환자를 구조하기에 해경에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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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경찰청이(가) 창작한 ‘서해해경 아카이브’ 사라지는 항·포구 ㊻하의면 신도항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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